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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호박'으로 세계를 물들인 쿠사마 야요이 별세

이종균 기자

입력 2026-08-28 15:32

[넥스트포스트=이종균 기자] 끝없이 반복되는 물방울과 그물, 거울 속 무한한 공간으로 현대미술의 경계를 넓힌 일본의 세계적인 전위예술가 쿠사마 야요이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7세.

쿠사마 야요이 스튜디오는 27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쿠사마가 지난 14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고 밝혔다. 교도통신은 사인이 다발성 장기부전이라고 보도했다.
'물방울·호박'으로 세계를 물들인 쿠사마 야요이 별세
스튜디오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고 영원한 사랑과 영혼을 계속 탐구했다"며 "작가의 뜻을 이어받아 예술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향한 힘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에서 태어난 쿠사마에게 반복되는 점과 그물무늬는 단순한 디자인 요소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던 시각·청각적 환각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하나의 형태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증식시키면서 개인의 존재가 무한 속으로 사라지는 '자기소멸'이라는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발전시켰다.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뉴욕 전위미술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캔버스를 작은 반원형 붓질로 끝없이 채운 '인피니티 네트(Infinity Nets)' 연작부터 천과 솜으로 만든 소프트 스컬프처, 퍼포먼스와 설치작업까지 장르를 넘나들었다. 거울과 빛을 이용해 공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경험을 만드는 '인피니티 미러 룸' 역시 이후 쿠사마를 상징하는 작품군이 됐다.

그의 작업은 팝아트나 미니멀리즘이라는 하나의 사조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회화와 조각, 설치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영화, 패션, 소설과 시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전후 현대미술의 여러 흐름과 맞닿았다.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도 창작은 멈추지 않았다.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관에 참여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다시 크게 주목받았고 이후 영국 테이트 모던,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 세계 주요 미술기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이어졌다.

노년에도 작업량은 줄지 않았다. 2009년 시작한 대형 회화 연작 'My Eternal Soul'은 2021년까지 12년 동안 약 900점으로 불어났다. 같은 해에는 새로운 회화 연작 'EVERY DAY I PRAY FOR LOVE'를 시작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신작 제작을 이어갔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이미지는 단연 호박이다. 노란 표면을 검은 물방울로 뒤덮은 호박 조각은 일본 나오시마를 비롯한 여러 공간에 설치되며 쿠사마의 이름을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에게까지 각인시켰다. 반복되는 물방울과 강렬한 색채, 사진으로도 즉시 알아볼 수 있는 조형 언어는 미술관 밖 대중문화와 패션 영역으로까지 확장됐다.

대중적 인기만큼 미술시장에서의 위상도 높았다. 1959년작 'Untitled (Nets)'는 2022년 뉴욕 필립스 경매에서 1049만6000달러에 낙찰됐다. 당시 쿠사마 작품의 경매 최고가였다. 호박 연작 역시 국제 경매에서 수백만달러에 거래되며 그의 작품은 세계 현대미술 시장의 주요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쿠사마의 작품세계를 보존하고 알리기 위한 공간도 만들어졌다. 작가가 직접 설립한 쿠사마 야요이 미술관은 2017년 도쿄 신주쿠에 문을 열었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며 쿠사마가 작품을 통해 강조해 온 세계 평화와 인간애를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2016년 일본 문화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서도 쿠사마는 해외 현대미술가 가운데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작가였다. 물방울과 호박 연작은 국내 미술관 전시와 아트페어, 경매 시장에 꾸준히 등장했고 주요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면서 미술 투자자들의 관심도 이어졌다.

그의 예술에서 물방울은 평생 반복됐지만 같은 이미지의 단순한 재생산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환각에서 출발한 점은 캔버스의 그물이 됐고, 조각과 거울방을 거쳐 거대한 호박과 공공미술로 확장됐다.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 강박적 이미지가 전 세계 관객이 직접 들어가 경험하는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쿠사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70년에 가까운 창작 활동 동안 되풀이했던 '무한'과 '사랑', '자기소멸'이라는 주제는 이제 작품과 미술관을 통해 남게 됐다.

넥스트포스트 이종균 기자 jay@next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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